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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릭론
2009년 12월에 쓴 글
현대적 느와르
브릭 Brick, 2005
<브릭>은 현대판 느와르다. 사실 <브릭>은 추리영화보다야 느와르를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훨씬 많이 거론되었을 영화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이 영화를 찾아보았는데, 느와르니 뭐니 하는 정보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봤다가 25분 만에 참지 못하고 꺼버렸다. 이 영화가 느와르 앞에 ‘현대판’이란 수식어를 달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덕분이다.
필름 느와르
‘느와르’하면 으레 떠올리게 되는 분위기와 무드가 있다.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주로 홍콩식 느와르의 무드는 일종의 장르적 관습으로 굳어져왔다. 느와르 영화를 보는 관객은 자연히 그 빤한 관습을 즐기고 싶은 기대심리를 지니게 된다.
어두운 색감, 주인공의 묵직하고 느린 발걸음을 따라가는 카메라워킹, 심각한 인물들, 얽히고설킨 관계, 거대한 내막 등. 어둡고 심각한 분위기와 화려한 도시속의 고독한 개인에 대한 스케치는 느와르 영화를 선택할 때 기대하는 기본적인 것들이다. 장르적이라는 것은 이 같은 기존의 매뉴얼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관객이 어떤 영화를 단번에 느와르라고 느낄 수 있게 하려면 반드시 이런 요소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탈느와르적 코드
그런 면에서 <브릭>이 택한 장르적 해석은 비전형적이다. 그 장르에 기반 하지만 전형성에서 일정 벗어난 작품은 장르의 특성에 대해 고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다. 느와르의 주인공으로 소위 무게 잡는 멋있는 도시 아저씨들을 남루한 행색의 찌질한 십대 청소년으로 바꾸어놓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기존 느와르물의 아저씨들은 ‘도시적’이라는 전제를 감안하면 어느 정도는 리얼리티가 반영되나, 매우 현실과 유리된 느낌의 캐릭터들이었다. 인간적인 내면이랄까 이런 부분은 공감의 요소가 있지만 캐릭터 자체는 어쩐지 지극히 영화 속에서나 있을 법했던 게 사실이다.
<브릭>의 주인공 브랜든은 일단 용모가 느와르의 전형적인 주인공관 거리가 멀다. 유행 따윈 고려하지 않은 안경에 언제 닦은 건지 알 수 없는 뿌연 안경알이 보는 사람의 시선마저 흐리게 만들고, 멋이라곤 전혀 모를 것 같음은 물론이고 비위생적으로까지 보이는 후줄근한 헤어스타일과 차림새가 주인공 브랜든의 첫인상이다.
그런 브랜든이 안내하는 그의 행색만큼이나 남루하고 흐릿한 도시는 놀랍게도 캘리포니아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범죄의 무대로 설정되곤 했던 시카고나 뉴욕도 아닌 하이틴 로맨스물의 천국 캘리포니아라니. 몇몇 범죄・수사물에서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내세웠어도, 캘리포니아라는 도시 특유의 청명하고 밝은 원색의 화려한 이미지를 가져가 작품을 꾸미는 액세서리로 이용하는 식이었다.
내용상으로는 <브릭>의 무대가 캘리포니아든 어디든 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을 장르적으로 더 이해하기 위해서 캘리포니아라는 배경설정이 주는 상징성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곤경에 빠진 브랜든의 여인 에밀리에 의하면, 브랜든은 캘리포니아스러운 속물성에 지독한 거부감을 가져 스스로 도태되길 원했다. 작품 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밀리와 브랜든이 만나는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브랜든의 이러한 고뇌는 오히려 이질적인 배경설정이기에 가능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도시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서의 고독감이 캘리포니아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남루하고 흐릿한 영상미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현대적 코드
-하이틴 캐릭터
브랜든이라는 인물이 겉으로는 느와르답지 않더라도 안으로 들어가면 분명 전형적인 느와르 주인공의 고독함을 지니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캐릭터들도 다분히 익숙한 설정들이다. 약한 여자, 팜므파탈, 권력을 쥐고 있는 어둠의 무리, 주인공에게 무한도움을 주는 브레인, 주먹이 우선하는 인물 등 전형적인 캐릭터설정이 내용상의 재미를 깎아먹는 요소이긴 하다.
그러나 미국 하이틴 세계를 다룬다는 설정에서 이미 기존 느와르와의 전형성과는 차별되는 지점을 획득하기에 이정도 단점은 극복된다. 느와르인 동시에 하이틴물이라는 오묘한 조합이 주는 재미가 생각보다 쏠쏠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느와르 영화 <달콤한 인생>이나 <상성>과 비교해보더라도 느와르의 전형성에 동양사상적 깊이나 잘 닦인 비주얼 등을 플러스시킨 것에 비해, <브릭>이 느와르의 주인공으로 하이틴을 내세웠다는 것은 상당히 차별된 지점임엔 틀림없다. 그리고 <브릭>의 하이틴 캐릭터들은 분명한 흥미 포인트로 작용한다. 인물들은 작품이 전체적으로 비루한 무드임에도 불구하고 상큼한 느낌을 함께 가져가게 해준다. 같은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한 하이틴물 <The O.C>나 십대들의 어두운 면을 다룬 <스킨스>를 봐도 이 드라마들이 인기를 끈 건 마치 어른세계를 닮은 듯 심각한 세계이지만, 그 속에 십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아저씨들이 주인공인 느와르 영화들에 비하면 <브릭>의 십대들이 처해있는 난점은 비교적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보다보면 정말 하이틴드라마를 볼 때의 기분으로 사건의 진상이 궁금해진다. 전형적인 추리극의 인물임과 동시에 십대들이기 때문에 캐릭터의 전형성도 마냥 고루하지 않다는 건 분명 이 영화의 매력이다.
-‘브랜든’
서두에 말했듯 무엇보다 강하게 끼쳐온 이 영화의 첫 인상은 미국 특유의 비루함이다. 풍경이나 인물들의 관계, 습관, 행동들에서 말이다. 나로 하여금 <소년은 울지 않는다>를 보며 경악하게하고, <나비효과>를 단순히 더러운 영화로 기억하게 한 그 비루한 미국냄새가 내 얼굴을 납빛으로 만들었다. 아름답고 멋진 영화만 좋아하진 않지만 적어도 ‘미국의’ 비루함은 미치도록 싫은 것이어서 이 영화를 1차 포기하게 했다.
<브릭>은 멋있지 않다. 그러나 볼수록 어떤 고전 느와르보다 더 심각히 젠체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남루하면서도 심각한 척을 버리지 않는 <브릭>의 코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주인공 브랜든의 캐릭터다. 브랜든의 외형은 정말이지 초라하지만, 작품을 보면서 느껴지는 그의 당당한 태도나 심각한 눈빛을 보며 같잖다는 생각도 들면서 점점 은근히 멋져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은근한 옴므파탈적 매력은 오히려 대놓고 멋있는 남자주인공을 설정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어 보인다. 처음엔 저건 뭔가 싶어 짜증스러울 정도였다가 작품을 보면서 점점 매료되다가 끝내는 매력적으로 보이는 브랜든이란 캐릭터의 이미지가 작품 전체의 이미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비루한 속에서 가장 남루한 주인공 브랜든이 심어준 불편한 인상이 매력으로 다가오는 때가, 바로 작품의 재미가 절정에 달하는 순간인 것이다.
비전형성
기존 느와르의 영상과 대비되는 색감을 택한 것은 물론이고, <브릭>이 현대적 코드를 취하는 것은 느와르의 장르성을 비트는 것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가 영상기법에 대한 고민까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독특한 영상기법이 주는 재미가 이 작품을 즐기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지점에서 <브릭>은 느와르의 전형성을 탈피함과 동시에 영화적으로도 새로운 지점을 지니게 된다.
<파라노이드 파크>에 대해 어떤 네티즌이 ‘예술성 짙은 스토리에 주인공의 비주얼로 대중성을 고려한 감독’이라고 평한 것을 본적이 있다. 공통점이라고 놓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브릭>이 ‘폼 잡는 어른들의 이야기’로 여겨졌던 느와르를 하필 하이틴 스토리로 끌어온 의도와 비슷하다면 비슷하게 여겨진다. 비록 저예산이지만 배우들은 드라마에서 얼굴을 잠깐 알린 젊은 배우들로 캐스팅한걸 봐도, 느와르 마니아라는 감독이 느와르의 전형성을 비틀어 보이기 위해 참신하고 상큼한 코드를 만들려 노력했다는 건 알만하다.
참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현대’라는 개념은 늘 언제나 그렇듯이 전형적인 노선에서 엇나갈 때 ‘참신한=괜찮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준다. 전형적인 문법을 따른 영화들이 반드시 완성도 높은 경지에 도달해야만 호평 받는 것에 비해, 비전형적인 작품들은 그 비전형성으로 인해 미숙한 점을 옹호 받고도 남는다. <브릭>역시 빤한 장르적 답습이 아주 거슬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전형적인 느와르 코드를 벗어난 요소들이 이 영화를 괜찮은 느와르 영화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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