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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신발
2009년 9월에 쓴 글
지붕 위의 신발
뱅쌍 들르크루아 <지붕 위의 신발>
Vincent Delecroix <La Chaussure Sur Le Toit>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에, 재밌다는 것 외엔 다른 말을 생각할 수 없었다. 재미라는 말을 여러 의미로 사용하긴 하지만 신발 한 짝이 주는 재미라니, 이것은 꽤나 특별한 재미인 것이다. 어떤 것을 재미있어한다는 건 그 자체로 완성도 있고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아름답게 보아주고 여겨주고 싶은 ‘무언가’로 인해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이다. 내 취향은 아무래도 ‘아름답지만 재미없는’ 보다야 ‘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재미있는’ 쪽이다. 일단은 재미가 동하면 노력과 정성을 투자해 예쁘게 봐주고 싶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애써 좋게 봐주는 게 아니라, 내가 발견해낸 아름다움을 부여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작가는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지붕 위의 신발에서 그러한 재미를 느낀 모양이다. 잔뜩 구겨진 채 빗물받이 홈통에 널브러져 있는 신발은 상상만으로도 현대의 시각적 미학을 가차 없이 배반하는 아이템 같다. 그렇기만 한가. ‘지붕-위에-있기’는 참혹할 정도로 아무것도 덧붙여지지 않은 상태이다.(‘미학적 요소’,p218) 어느 날 문득 쳐다본 창밖 지붕 위에 뚝 떨어진 것처럼 덩그러니 놓인 그것을 발견한다. 저게 언제부터 있었지, 그동안 왜 몰랐지 하는 물음도 소용없다. 건물이 세워질 때부터 그곳에 자리를 틀고 앉은 터줏대감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지금 방금 막 불시착해 이 상태를 어찌해야할지 모르는 순진한 외계인 같기도 한 모습이, 길을 잘못 들어 할렘가까지 간 아시아인을 연상시키기도 할 것이다.
신발의 목소리
단순히 그러한신발의 사연이 궁금했을 수도 있다. 어쩌다 저기 있게 됐을까를 생각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을 추측해본 것이 이야기의 시초일지 모른다.
‘미학적 요소’에서의 화가는 아무 이유가 없는 지붕 위의 신발을 관객으로 하여금 보게 하는 전시회를 연다.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해 이 전시 작업에 오류가 있음을 지적하는 남자가 작가의 분신임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남자는 신발에 관해 가능한 모든 설명을 다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이 단지 작품 제작기에 대한 설명, 신발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에 그칠 수 없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본능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의 덩그러니 놓인 상태 이전의 사연을 불어넣어주고 싶고(혹은 내가 겪듯 생생히 느껴보고 싶고), 나와 다른 시선 다른 처지에서는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보게 되고. 언젠가 내가 우연히 들은 가수의 목소리에 매료되었을 때와 비슷한 마음이다. 아주 튀는 목소리도 아니고 언뜻 지나치기 쉬운데, 어쩐지 무언가 때문에 마음에 남아 기술의 힘이라도 빌려 더 잘 들어주고, 남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목소리. 작가는 지붕 위에 덩그러니 버려진 신발 한 짝에서 그런 목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신발의 테크닉
시각적 매혹의 테크닉이 뛰어난 황금빛 하이힐 같은 것과 비교해보면, 이 소박하다 못해 볼품없는 아이템의 기술치는 마이너스에 가까워 보인다. 약간의 미숙한 면으로 인해 리스너로 하여금 능동적 동요를 하게 만드는 목소리. 이 미숙함이 보컬테크닉이 부족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완성도 있는 상품으로서의 가치로 테크닉을 얘기한다면 맞는 말이지만, 시대가 발전할수록 취향은 다양해지고 완성도의 의미도 각자 취향의 차이로 이어진다. 미숙함에도 테크닉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발달함에 따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지붕 위의 신발은 자신의 사연을 설명하는 어떠한 테크닉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설명을 필요로 한다. 기술자로 하여금 기술을 발휘하게 하는 존재의 상태, 이것 또한 테크니컬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정해본다. 이 설명해주고 싶게 만드는 신발의 테크닉이, 아름다운 몸체만으로 존재이유가 설명되는 새 구두의 그것보다 좋을 수 있다. 고흐의 신발보다도 더 참혹한 아무것도 없음이, 결국에는 이 신발을 가장 다채로운 사연을 지닌 신발로 만들었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첨단의 감각을 지닌 이야기꾼에게 발견된 까닭이겠지만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에필로그 ‘천사의 추락’의 남자는 천사가 아니다. 지붕 위로 힘들게 올라가서 얼마간 천사의 마음을 가졌을 뿐인 소시민이다. 자신의 고독을 견디다 못해 지붕 위로 올라간 남자가, 모든 인류의 고독을 껴안고 희생할 생각을 한다. 나름 엄청난 소명의식을 가졌던 그가 지붕 위에 남길 수 있었던 건 겨우 신발 한 짝이다. 고뇌 끝에, 인류를 위해, 겨우 신발 한 짝 내놓은 것이다.
남자는 신발을 하나의 생명, 고독에 의한 희생이라 생각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일지라도 고독의 증표만 된다면 아무거나 상관없었다. 남자는 외로움과 패배의식에서 시작하여 진지한 고민도 했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을 내던지는 것에 겁이나 신발 한 짝으로도 충분하단 생각을 한다.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발휘된 기지이기도 하다. 어쨌든 다 잘 된 일이지 않은가. 목숨 하나의 희생보다야 신발 한 짝 버려지는 게 훨씬 덜 끔찍하다. 뿐더러,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하고 싶게 하여 누군가에게 재미까지 주었으니 말이다.
내가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한 기술적 행동은 그저 좋은 음질의 파일을 찾아 좋은 이어폰으로 주의 깊게 들어주는 정도였지만, 작가는 거의 무에 가까운 것에서 여러 이야기를 뽑아내는 생산적 기술을 발휘해 이 소설을 썼다. 불완전한 재료로 미숙한 솜씨를 뽐내고 혼자 즐거워하는 아마추어로썬 작가 같은 테크니션이 굉장해 보인다.
그러나 신발에 관해 가능한 모든 설명을 다 해야 한다고 말했던 남자 이전에, ‘천사의 추락’의 남자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작가가 아닐까 싶은 인물들이 나오곤 하지만, 이 남자가 가장 작가와 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에필로그가 프롤로그 같기도 하고 작가 나름의 예술론으로도 읽힌다. 처음에는 엄청난 얘기를 해보고 싶다가도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면 아무거나라도 상관없는 것에 관해 쓰게 되는, 그것 외에는 쓸 수 없는 작가.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구원을 결정하는데, 예술이라고 소설이라고 다르겠는가. 얘기되어지지 않은, 얘기되어질 것 같지 않은 것들에 관해 가능한 모든 얘기를 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지붕 위의 신발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재밌는 신발
신발을 통해서 예술론까지 말해지지만, 고독을 대표하는 얼굴로서의 임무수행을 하는 신발은 각 이야기마다 각양각색의 역할로 등장한다. 철학적 소명을 완성하기도 하고, 그리움의 대상도 되고, 처단해야할 사회의 악덕 취급도 받았다가, 예술적 피사체가 되기도 한다.
각자 다른 이야기의 인물들이 신발을 통해 고독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기본뼈대에서, 공통적으로는 아이러니한 순간의 계기가 되거나 아이러니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신발 한 짝에 작품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대처법이 이 작품이 재미있는 이유다. 새삼스럽게도, 이렇게나 사람이 다르구나 싶은 거다. 사람이 다르다는 것만큼 신기한 게 있을까.
분명 같지만 진실의 측면에서 본다면 다른 신발들. 신발이 얘기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내내 생각해보았지만, 얻은 결론이라곤 ‘아무것도 아닌 것’이며 그래서 ‘가능성 있는 상태’이고, 같은 걸 보고도 모두가 다르게 느끼기 때문에 ‘각자의 것이면서 모두의 것’이라는 것 정도다. 뭔지 알려다보니 정말로 더 헷갈려서 머리가 핑핑 돈다. 어쨌든 분명한 건 신발 한 짝을 놓고 쓴 소설이 이렇게나 재밌다는 진실이다. 신발이었으면 어떻고 모자나 모니터, 혹은 개 목줄이었으면 또 어떤가. 그래도 이 얘기들은 재밌었을 것 같다. 신발이 고독하다고 해서 얘기가 고독할 순 없다. 한 짝의 신발만큼이나 고독한 사물들은 많다. 우리가 그렇게 항상 마주치는 고독인데 좀 더 재미있고 산뜻하게 마주치면 좋잖은가. 신발도 다른 무엇들도, 그런 생각이면 재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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