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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에 쓴 글




제 5 도살장

Kurt Vonnegut <Slaughterhouse-Five>

The Slaughterhouse Five.jpg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이 소설은 전쟁 소설이다. 미군인 주인공은 용맹한 영웅이 아닌 어리고 허접한 병사.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지만, 전쟁의 향수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몇몇 어른들을 빼고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군의 대부분은 채 성년이 되지 않은 미성숙한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허약한 아이들 중 한명인 빌리 필그림의 이야기를 통해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을 간접체험하게 된다.



전쟁과 폭격에 관한 이야기가 새로운 텍스트는 아니지만, 초반부부터 느껴지는 남다른 캐릭터의 주인공이 보여줄 방식이 기대가되었다. 그래서 술술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빌리 필그림의 이야기는 예상보다 난감했다. 짧은 챕터들로 이루어진 불규칙한 이야기 전개는 트랄파마도어식 전보문 형식이라는데,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이 어지러운 이야기에 몰입해가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주인공의 사고체계대로 이야기를 서술하기 위해선 이런 방식이 불가피했을 것이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형식 자체가 대폭격을 겪은 사람의 균열이 가득한 정신세계를 어떤 심각한 에피소드보다도 효과적으로 전달해주지 않았나 싶다.



에피소드 중에서는 정신병동에서 역시 전쟁을 겪은 환자인 로즈워터에게 킬고어 트라우트의 SF소설을 추천받아 심취하게 되는 부분이 그랬다. (그들은 둘 다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는데, 그들의 전쟁 경험도 한 가지 이유였다. ……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우주를 다시 발명하려 애쓰고 있었다. 과학소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P121) 

  


정말로 빌리가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갔던 것일 수도 있지만, 후반부에나 등장하는 트라우트의 <대형 게시판>이라는 작품은 트랄파마도어 에피소드 또한 빌리의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착란일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던진다.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 그렇게 가는 거지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납치되어 트랄파마도어적 시간관을 배우는 이야기가 예전에 <대형 게시판>을 읽었던 기억의 혼합이라 하더라도 이 이야기는 꼭 필요하다. 물론 순간과 전체를 한데 영원으로 보는 그들의 시간관이 아주 새롭지는 않다. 모든 것이 필요성에 의하여, 우연이 원해서 존재하고 일어난다는 인식론은 전쟁에도 대입되어 빌리로 하여금 드레스덴 폭격에 관해 ‘압니다. 불평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해합니다.’ 등의 말을 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반전소설이라는 의의에 나름 집중하여 읽었던 나로썬 순간 반발심이 드는 대목이었다.



우주의 멸망을 알고 있음에도 막지 않고, 그저 좋은 시간에만 관심을 집중하라는 트랄파마도어적 사고가 얼핏 초라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이라는 경구와 맞물려 피해갈 구멍을 크게 만드는 소시민적 나약함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빌리 필그림 이야기 바깥에 있는 화자에 의하면, 빌리가 지구인들에게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운 것을 말해주는 부분이 아니라, 폐허가 된 드레스덴에서 노병 에드가 더비가 체포되는 부분이란다. 에드가 더비는 보잘 것 없는 늙은 보병이지만 이 소설 내에서 유일하게 용기 있는 행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군 부대의 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들른 나치당원 미국인 캠벨을 향해 비난을 던지고, 인간적인 연설을 했다. 빌리는 그 순간의 그를 대단한 인물로 기억한다. 그런 그가 폭격을 맞아 달 표면처럼 된 폐허 속에서 찻주전자를 챙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빌리가 후에 아내에게 에드가 더비의 이야기를 해주기에 앞서,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아무것도 상처입지 않았다’ 라는 말을 떠올린 것은 지구인의 상식으론 맞지 않는 소리이며, 동시에 지극히 트랄파마도어적인 사고이다. 물론 행복한 순간에만 집중하라는 건 늘 전체를 볼 수 있는 트랄파마도어인들이 일부밖에 볼 수 없는 지구인 기준에 나름 맞추어 내린 해법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빌리는 아무리 습관처럼 무심하게 ‘그렇게 가는 거지’라고 얘기한들, 상처 입는 다른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되새기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트랄파마도어에서 배워 온대로 전쟁의 끔찍함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그 순간만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한 뒤에, 정신분열증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도 상처 입은 말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과 드레스덴 폭격에 정신적 외상을 입어, 흐트러진 자신의 우주를 다잡기 위해 몰입한 트랄파마도어에 관련된 모든 이야기들이 빌리를 더더욱 정신분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모든 건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다는 걸 알기에 전쟁에 의한 죽음 또한 의무적인 춤임을 받아들이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눈물을 멈출 순 없다. 인생의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여행하고 싶어 했지만 행복한 여행은 그렇지 않은 여행보다 훨씬 짧은 순간이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집필하는 20년 동안 얼마나 많이 이해하려하고 그럼에도 슬플 수밖에 없었는지, 예전에 읽은 무명작가의 SF소설을 읽은 걸 착각하여 외계에 다녀왔다고 헛소리를 하는 주인공을 보며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내에서 드레스덴 폭격을 이야기하는 몇몇 서적들은 거의 작가의 가상인 듯하다. 간단하고 명료하게 그렇게 얘기해보고 싶었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20년 만에 결국 이런 정신분열증적인 소설을 내놓은 건, 우연이 원해서일 것이다. 용기를 냈던 노병이 총살당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해심과 평정심과 어디까지 미쳐도 되는지에 대한 분별력에 대해 고민하다 이렇게 외계에서 보내오는 전보식으로 얘기하는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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